가방 보내고 7시 전에 출발

같은 층에 방이 3개였는데, 옆 방에 젊은 남녀 스페인 커플이 있었고, 다른 방에는 자정이 다 되어서 들어온 거 같았는데 새벽 3시반? 4시반? 그쯤에 한 명이 화장실 들어가 씻다가 둘이서 5시쯤 나가는 거다. 그 소리를 다 듣고...새벽 3시반 정도에 화장실 다녀왔다가 아들 녀석이 내 쪽으로 와서 자고 있길래 옆으로 가려다 그대로 침대 밑으로 어둠 속에서 추락...
배낭 두 개를 Paq Mochila 서비스로 보내기로 했기에 미심쩍지만 숙소 밑 엘리베이터 앞 바닥에 그냥 배낭 두 개를 두고 출발.

확실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공장도 많아지고, 차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도 많아진다. 스페인 방송국도 지나칠 수 있었고.
오늘도 어제처럼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다.

어제 만난 한국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쭉쭉 뻗은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는 숲들이 많다.

알모도바르 감독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아?
라고 아들에게 말했는데, 생각해보니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영화 분위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저 나무들을 보면, '판의 미로'가 생각나지 않아?

열한 시 조금 넘어서 도착해야
12시 미사에 참석할 수 있다고 제미나이가 말해줘서, 꼭 그 시각에 도착하려고 가방도 미리 보내놓고 가볍게 걸었던 마지막 날.
4일 동안 매일 배낭 메고 걷다가, 마지막 날에 배낭 없이 걸으니 어쩐지 좀 허전하다.
스틱도 성당에 못 들도 들어간대서 가방과 함께 부쳐서 아무 것도 없이 가볍게 걸은 오전 순례길.

똑같이 생긴 건물들이 많은 Monte de Gozo
캠핑장 같은 곳이 나오는데, 미사 보는 곳도 있고 기도하는 곳도 있고. 살짝 감옥소 같은 느낌이 도는 건 왜일까
고조 산 국립공원 근처.

고조 산 국립공원
순례길의 막바지 같은 이곳에 오래된 성당이 있었다. 아마 역사적으로 뭔가 유명한 곳 같은데, 찾아볼 시간 없이 패스.
바쁘다 바빠 11시에 도착하려면 바삐 가야.아들래미는 날 째려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쪽에 가까워질수록, 작은 시골마을들은 모두 사라지고 커다란 대도회의 느낌이 물씬.

등산 스틱을 하늘을 향해 올리며 만세하는 사람
앞에 가던 순례객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입성하면서 두 팔을 번쩍 치켜올린다.
아마도 한달 넘게 길게 걸었던 사람이라, 종착지에 다다르니 기분이가 좋았던 게지?
난 단 5일 걸었지만 나도 웬지 흡족해지는 기분.

11시 15분 정도에 도착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도착 직전
어딘가 나도 뭉클해져서 동영상을 찍으면서 내려가는데,
갈리시아 지방 전통 악기 가이타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다. 스코틀랜드 백파이프와 비슷한 소리.
가이타를 들으면서 계단을 걸어내려와 왼쪽으로 커다란 대성당이! 광장이 탁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도착이다! 순례길의 종착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카톨릭도 아닌데 왜 미사에 들어가냐고
입이 나온 아들. 도착하면 감동의 대가니에 얼싸안고 화해 모드, 기쁨의 얼굴일 줄 알았건만 퉁퉁 입 나온 중2병.
어렵게 어렵게 옆에 앉혀 두고, 그 전날 도착한 순례자들의 출신 국가들을 불러주시는 정오 미사 참석.
카톨릭인 사람들도, 아닌 사람들도 섞여 있는 모양새.
스페인은 도시별로 불러주시고,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은 "순례객"이라는 단어까지 그 나라말로 해주시지만, 야시아 나라들의 순례객들은 그냥 스페인어로 해주시네. 뉴질랜드, 미국, 한국, 말레이시아, 타이완...어제도 천 이삼백명이 도착했다고.

45분 정도의 미사 후
카톨릭 신도들이 줄지어 나가서 성체를 받아먹는 시간에 살짝 빠져나온 우리는, 순례자 여권을 보여주고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는 곳으로 걸아갔다. 미리 QR코드 찍어 놓고,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번호표 뽑고, 각 창구에서 순례자 여권 보여주고 도장 받고 인증서 받으면 되는데, 사람들이 많으면 오래 기다릴까봐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시스템이 진짜 잘 되어 있어서 하나도 안 기다리고 바로 받았다. 킬로미터까지 표시된 거 받으려면 2유로인가 추가로 내야 하고, 인증서를 집어 넣을 조그만 통까지 사려면 또 추가로 2유로를 내면 된다.

쎄자르의 명복을 빌다
시댁에서 기르는 복서, 쎄자르가 항암투병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쨍한 하늘에 눈물이 마구마구 솟아올랐다.
쎄자르가 좋은 곳으로 갔기를 명복을 빌었다.

Meson 42
이 도시에 사는 지인이 추천해 준 맛집. 미리 예약하고 갔다.
또르띠야가 유명한지 여기 저기 테이블에서 시켰는데, 우리는 문어와 바베큐 모듬 세트를 시켰다. 42유로. 디저트도 포함. 행그리 아들 달래기
다 진짜 맛났다. 이 도시에 가시는 분들께 강추!



과연 내 배낭이 무사히 도착했을까 Paq Mochila by Correos
점심 식사 후 성당 근처 우체국에 갔더니, 새벽에 보낸 배낭 두 개가 잘 도착해있더라.
난 7유로에 배낭 맡기는 요금까지 포함된 건 줄 알았더니, 몇 시간 보관해줬으니 6유로 더 내라고 하더라. 그래도 배낭메고 왔다가 미사 시간 놓치고, 배낭 맡기려고 헤매다가 못 들어가는 것 보단 낫지. 이 서비스 추천합니다!
5일간 115킬로 걸었던 순례길 완료
첫 날은 쫄아있다가 별 거 아니네.
둘째 날은 햇살에도 바람 하나에도 감사의 마음.
셋째 날은 세상에서 젤 맛난 문어 먹고, 츤데레 아들에게 감동.
넷째 날은 돈 주인 찾아주고 길 잃은 할아버지 도와드린 날.
마지막 다섯째 날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쎄자르 명복 빌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완주한 뿌듯함.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더 길게, 다른 루트로도 가보고 싶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맛배기였지만, 정말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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