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저녁, 한국에서 온 동생과 함께 마드리드 시내 중심가의 부티크 호텔이자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등불이 꺼지는 거다. 음...? 잠깐 정전이겠지 뭐...하고 약간의 어둠 속에서 대수롭지 않게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데, 한 10분 정도 지나니 아예 인터넷이 되지 않아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상황이지?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이게 나 뿐 아니라 온갖 모든 손님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었고, 호텔 직원들이 바리케이트(?)처럼 입구를 막고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 스페인 뿐 아니라 포르투갈 프랑스에서도 겪고 있는 대정전 사태라고 하는데, 이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며 호텔 밖으로 나왔다.
2025년 4월 28일 월요일, 마드리드 시각 오후 1시쯤?
동생이, "엄청 신기해. 요리사들도 나와 있고, 가게마다 다 문닫고 직원들이 거리에 나와있네. 다들 전화기를 들여다보거나 뭐라뭐라 말을 하는데..?"
나는 이때까지도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고개를 드니, 헐....신호등이 다 꺼져있는거다.!
뭐지? 하면서 전화기를 확인해보니, 남편에게서 "우리 동네 정전이 된 거 같아. 집 앞 지하철이 다니지 않으니 애들 학교 쪽에 차를 세우고 시내에서 점심 먹고 올게" 라는 문자가 12시30분쯤 와 있었다.
남편이 동네에 국한되었다고 착각했던 건, 사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지역에 걸친 대정전 실제 상황이었고, 어떤 전화기도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
제일 처음 들었던 생각은,
'집에 돌아가는 길은 6킬로지만, 모든 지하철, 기차가 다 멈췄는데 어떻게 하지? 고속도로를 통해서 가는데... 그 길을 걸어가야 하나?'
(실제로 고속도로를, 지하철 터널을 마드리드 사람들은 걸어서 갔다...)
그 다음 들었던 생각은,
'남편은 어디 있지? 애들은 학교에서 어떻게 돌아오지?'
(다행히 남편은 집에 있었지만, 애들이 스쿨버스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결국 자전거로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스쿨버스는 통지 없이 취소되었으므로...모니터요원도 버스들도 당연히 제시간에 오지 않았으니까..)
마지막으로 들었던 생각은,
"잠시 후 엄마랑 고모가 한국에서 두바이 경유 마드리드 오는 비행기를 타실텐데, 두바이에서 마드리드로 오실 수 있을까? 이번 주 금요일 출발하는 크루즈 여행 가는 기차는 작동하려나? 이러다 이미 지불한 엄마 칠순 기념 지중해 크루즈 여행이 다 취소되려나!'
(정말 천만 다행으로 이날 밤 11시무렵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다시 모든 일상은 정상화되었다...지금 이 글은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 쓰고 있고.)
20분을 걸어 마드리드 시내 교통요점 중 하나인 아베니다 데 아메리카(Avenida de America) 터미널로 향했다. 한 오후 1시30분쯤? 원래 예약했던 식당도 혹시나 하고 지나갔지만, 역시나 모든 스탭들이 밖에 나와 "문 닫았어요.. 영업 못 합니다. 지금 모든 텔레커뮤니케이션은 안 돼요. 유일하게 되는 게 라디오입니다." 라고 하더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걷는데, 한 빵집이 웬일로 문이 열려있고 사람들이 앉아 있는거다. 반가운 맘에 들어가니, 직원은 "현금만 받아요"라고 하더라. 당연히 정전 상태니 그렇겠지. 다행히도 같이 있던 동생이 현금이 있었고, 혹시나 두시간 쯤 고속도로로! 집에 걸어가야할 사태를 위해 동생은 설탕 봉지들을 알뜰살뜰히 챙겨 놓았다.
그 앞 커다란 교차로는 작동하지 않는 신호등과 죽죽 막혀있는 자동차들과, 불안한 눈빛으로 정류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엄청 많았고, 다행히 직원들이 버스들이 다닌다고 하는 거다! 우리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줄을 서기 시작했는데, 와...평소보다 한 10배는 사람들이 많아보이는데 줄이 점점 길어지고, 동생은 급기야 "이러다 압사사고 당하는 거 아냐?" 라는 무서운 발언을!
40분 정도 기다렸을까? 2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우리가 탈 버스가 들어왔고, 이제 살았다라는 느낌으로 버스에 올랐다. 꾸역꾸역 사람들은 계속 올라탔고, (이와중에 카드 찍으라고 하시는 버스기사분..안 찍고 그냥 올라타는 사람들...) 다행히도 동생과 나는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고 있는 거다.
유럽 15개국이 영향을 입었다...사이버 공격의 우려가 있다...프랑스도 포르투갈도 영향을 입어 다 정전이다...
사이버 공격이라고? 그럼 누가? 러시아? 이스라엘? 도대체 어디가? 전쟁이 나려나..?
겨우겨우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있던 남편이
"지금 이 사태가 일주일이 갈지, 이주일이 갈지 몰라. 너 현금 얼마 있어? 우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슈퍼마켓도 식당도 뭐도 다 닫았어. 냉장고도 안되니...일단 냉동실에 있는 것들부터 빨리 먹어야해. 집에 부탄가스 한 통밖에 없으니 구할 수 있으면 구해보자."
생각보다 돌아가는 사태가 심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일단 다급한 건 아이들의 귀가.
차가 꽉 막혀있고, 버스도 오래 기다려야 하니, 자전거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겠다며 남편은 나섰고...
혹시나 스쿨버스가 있으려나, 남편이 아이들과 길이 엇갈리나 싶어서 1시간을 길에서 기다리고.... 중간에 동네 중국 구멍가게 두 곳을 들려서 부탄가스를 구하려고 했으나 팔지 않았고, 양초 몇 개, 중국 라면 몇 개만 간신히 구했다.
제일 힘들었던 건, 모든 정보가 끊긴 상태에서, 엄마랑 고모는 출발하셨는지, 두바이에서 다시 서울로 회항하실지, 남편은 애들이랑 만났는지, 스쿨버스를 같이 타고 오는 건지, 모든 불안과 물음표 속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시간 반을 길바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집에 7시 다 되어 들어왔고, 잠시 후 남편과 막내가 2시간을 걸어 집에 도착. 큰 아이들은 자전거로 도착. (둘째는 자전거로 가던 아빠를 만나, 아빠가 준 자전거로 돌아왔고, 이후 남편은 걸어서 막내를 데리러 갔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불안한 맘에 남편과 첫째는 자동차로 들어가 라디오로 정보를 얻겠다며 나갔고, 여기 저기 양초에 불을 붙이며..이걸 얼마나 아껴야 하나...어둠이 다가올수록 심란함은 커지기만 하고.
엄마와 고모가 두바이에서 잘 오시기를, 제대로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이런 저녁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고, 손전등을 밝히며 오무라이스잼잼을 읽고 있던 중, 11시 경에 갑자기 불이 들어오는 거다.
윗집의 환호소리와 함께.
그렇게 10시간의 대규모 정전사태는 끝을 내렸고,
다음날 오후 무사히 엄마와 고모는 공항에 도착하셨다.
이게 무슨 일인지.
며칠이 지나고, 이건 사이버 공격이 아니고 원인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스페인 전력 공급망에 문제가 있었다고..? 음모론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그냥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과실 아니었을까? 근데 이게 말이 되나?